- 動搖(동요)와 平精(평정) (제147회 정기회 개회예배 설교)
- 허임복 2023.4.29 조회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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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1~6 / 동요動搖와 평정平靜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잔잔한 바다에 돌맹이 한 개를 던지면 일어나는 게 파장입니다.
나로도 바다 항구가 해질녘이면 일몰이 참 아름답습니다.
항구에 정박되어 있는 배가 얼마나 평온한 지 모릅니다.
그런 그림을 보면 우리는 마음에 평안을 느끼기고 하고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잔잔한 바다에 파도가 일면 그 배는 출렁이게 되고 더 거칠고 심한 파도가 밀려오면 닻줄도 끊어져 배는 바다 한 가운데로 밀려가고 말것입니다. 이때 가만히 있던 배가 파도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동요” 라고 말합니다.
동요가 일어나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떤 이는 놀래서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두려워서 떠는 이도 있을 것이고 차라리 죽는 게 낳다고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생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동요는 가만히 있는데 누가 돌을 던지거나 사건을 일으키면 일아나는 게 동요입니다.
교회도 가정도 내 건강도 동요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건강이 흔들리고 가정이 교회가 흔들립니다. 이게 동요입니다.
● 성경에서도 이런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흔들린다” 는 말이 시편에 자주 있는데 그것은 동요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린 글입니다.
시편10:6에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시편16:8에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21:7에는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 여호와를 내가 모셨으니 그가 내 오른쪽에 계시면, 의지하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결정적인 표현이 있는데 시편62:6에는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물론 이 성경들은 환란이나 위협 앞에서 흔들리지 않겠다는 시인들의 고백이지만 ... 지금 우리가 부딪치며 사는 삶 중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단어인 줄 믿습니다.
● 이 흔들림을 한자로 쓰면 動搖(움직일 動과 흔들릴 搖) 입니다.
기독교 초기 영성운동가인 에바그리우스가 이, 사람들의 영성의 기초적 작업을 하면서 “동요”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동요에 관한 에바그리우스의 주장입니다....
동요가 일어나면, 생각이나 처지가 확고하지 않고 자꾸 흔들립니다.
이 동요가 일어나는 것은 감각, 상에 의해서입니다.
즉, 보고 듣고 만져지는 이 像(모양)에 의해서 동요가 일어납니다.
누군가의 발언을 듣고 그 들려진 발언이 괘씸하면 동요가 일어납니다.
동요가 일어날 때는 인격과 지식 연륜도 상관없습니다.
최고의 지성인 국회, 학문의 전당 상아탑 보십시오. 동요가 일어나면 막 들고 일어납니다. 어떤 이의 행동을 보고 우리는 발끈합니다.
그런 상대의 발언이나 태도를 보면 또 가만있는 게 아니라 보고 들었으니까 좌중이 술렁이고.. 거기에 반응하는 또 다른 동요가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고 그 동요가 어떤 액션으로 내 몸밖으로 표현되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흔드는 심각한 적이 될 수 있습니다.
● 기독교 초기에 사막교부로도 불렸던 에바그리우스는.. 動搖에 반대되는 상태로 平靜(평정)을 언급했습니다.
동요의 요는 흔들 요(搖), 평정의 정은 고요할 정(靜)입니다.
평정이란 우리의 지성적 영혼이 온유하고 절제되어 “평온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샬롬할 때의 그 평안의 형태입니다.
열정을 가장하여 정의를 가장하여 우리의 생각이 격정적일 때, 우리 모두가 동요된 나를 잠재워 평정의 상태에 머물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인 거룩함을 표현해낼 수 있는 성전의 역할을 정중하게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바울의 옥중서신서 한 곳을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주 안에서 옥중에 갇힌 사도의 글입니다.
본문 1절의 말씀대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 사도는, 본문에서 “사랑, 용납, 평안, 성령, 하나”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에 감사하며 고백하는 성도는 한 소망...,
“같은 소망” 이 있다고 말합니다.
미아 엘피스/ one ... 한 소망, 이 단어는 사람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동사나 명사가 수식 없이 독립적으로 사용되는 곳에서는 대개 종말론적 성취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롬 8:24; 롬 12:12; 롬 15:13; 엡 2:12 등).
여러분, 우리가 함께 사는 이 세상이 한 세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장차, 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의 나라는 지금 우리 각자가 처한 각자의 상황과는 달리 같은 장차 입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1년 뒤, 10년 뒤의 장차는 10명 교회를 하고 있거나 100명 교회를 하고 있거나 위임목사로 있거나 시무목사로 있을 수는 있습니다만 우리 모두의 장차 미래는 한 소망의 장소가 아니겠습니까?
내 소망과 네 소망이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소망을 가진 그런 소중한 지체들이고 그래서 같은 일을 하는 동역자들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이런 놀라운 은혜의 거룩한 성령공동체 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지 않겠습니까?
에바그리우스는 놀랍게도 이 동요를 막아내는 길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사랑 가운데서” 를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랑...
이제 “그 가운데서... ”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전치사 “엔” 은 “안에, 함께 ....” 입니다.
엔 크리스트이면 그리스도 안에서, 엔 아가페 이면 사랑 안에서 입니다.
이 사랑은 필요할 때 부르짖어 어디서 나타나는 게 아니고 이미 나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 안에 와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 모두는 이 사랑 안에 머물러있는 거룩한 예수님 지체들 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았고, 느꼈고, 그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닫게 하신 성령님이 내주하여계시는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그 성령님은 내 안에도 여러분 안에도 같은 성령님으로 계심을 믿습니다.
그 성령님의 생각이 같고 마음이 같고 목적도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축도하는 데로 한 성령님이 우리 상호간에 서로 간에 교통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성령의 사람인 우리가 정의를 가장하여 성령님을 탄식케해서는 안될 것이고 억울함을 빙자하여 성령님을 근심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일이 먼저 우리 안에 결단되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고 자신의 동요를 억제하며.. 상대를 높이면서 이제는 미래를 소망하고 함께 설계해야합니다.
시대가 복잡하다는 말은... 우리의 할 일도 많아졌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다음 세대를 위해 고민하고 설계하는 노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많은 아름답고 진취적인 일들이 논의되어서 어둡고 지난한 세대가 아니라 소망과 희망으로 가득한 교회 생태계가 지금 우리들에 의해서 시작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제게, 우리에게 이 믿음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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