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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인도함을 받는 삶(4) / 김홍전 목사
운영자 2012.4.17 조회 274

성신의 인도를 받는 삶(4)

- 성신으로의 세례와 세례식, 성찬식 - (1:4-5, 고전12:13, 고후13:13)
 

우리 신약 성도들은 특별한 사역과 관련해서 성신의 도움을 받던 구약시대와는 달리, 인격과 생활상에 도움을 받는 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특별한 일을 맡은 사역자들만 성신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성신의 능력을 힘입어서 살아야 합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생활은 성신을 의지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성신의 인도를 받아서 살아가려면, 성신께서 우리 안에 오셔야 합니다. 흔히 쓰는 표현대로 하면 성신으로 세례를 받아야합니다. 성신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

그렇다면 성신께서는 누구가 보내서 우리 안에 오신 것일까요? 누구로부터 성신을 받는 것일까요? 성신을 주시는 분이 누구일까요? 그리고 성신께서 어떤 사람에게 오셔서 하시는 최초의 일이 무엇일까요? 또 성신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오늘은 이른바 성신세례를 어떻게 받게 되고, 성신세례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지 하는 도리를 생각하겠습니다.

1.성신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

(1)성신께서 주시는 세례인가, 성부와 성자께서 성신으로 주시는 세례인가?

성경에는 성신 세례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성신으로 세례를 받는다혹은 성신으로 세례를 준다는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성신께서 주체가 되셔서 세례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체가 있어서 성신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신께서는 누군가로부터 우리에게 보냄을 받아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성신을 보내시는 분은 누구이실까요? 누가 성신을 보내실까요? 이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계시해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3:11)

세례 요한은 자기가 주는 세례는 물로 주는 것이지만, 자기의 뒤에 오시는 예수님은 성신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성신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아버지께서 보내신다고도 하시고, 자신이 보내신다고도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4:26)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

성신께서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신으로 세례를 받는다혹은 성신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성신께서 주체가 되셔서 세례를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께서 주체가 되셔서 성신으로 세례를 주신 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신 세례라고 하면 성신께서 주시는 세례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성신 세례라는 말보다는 성신으로의 세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좋습니다. 성신께서 주시는 세례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께서 성신으로 주시는 세례입니다.

(2)세례받는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왜 성신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도대체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에서 쓰인 것일까요? ‘세례 받다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밥티조’(βαπτιζω)로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밥토’(βαπτω:물에 잠그다, 물에 적시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의미는 물로 휩쓸다’, ‘완전히 젖게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신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성신을 주셔서 성신의 능력과 역사에 완전히 들어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신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신의 능력과 역사에 완전히 들어가게(잠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신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신의 역사와 능력 하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3)성신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두 가지의 경우에 쓰였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몇 날이 못되어 성신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경우입니다(1:4-5). 이 약속대로 성신께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임하여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최초로 성신께서 교회 위에 임하신 것입니다. 성신의 역사가운데 들어가서 사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는 여러 가지 가시적인 표적들이 따랐습니다. 방언을 하기도 하고,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설명한 바 있는데, “우리가...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하신 경우입니다(고전12:13). 이 설명에 따르면 믿는 사람은 다 각자가 성신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가 성신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특히 요 3:8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의하면, 성신으로 난 사람은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어떤 가시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성신으로의 세례가 갖는 의미가 어떻게 다르고, 왜 그렇게 가시적인 현상의 유무에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 그리고 오늘날 우리 성도들 각자가 중생할 때에 성신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어느 경우에 해당되는 것일까요?

2.성신으로의 세례는 두번째 축복인가, ‘중생시에 받는 것인가?

오늘날 신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잇슈 중의 하나는 성신으로의 세례가 과연 제2의 축복인가, 중생인가?’라는 주제입니다. 한편에서는 오순절적인 성신으로의 세례를 성도들이 중생한 이후에 받아야 할 제2의 축복으로 주장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오순절적인 성신으로의 세례를 제2의 축복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고린도전서적인 성신으로의 세례를 중생과 같은 것으로 주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논의 되어 왔던 것들을 다 언급할 수는 없고, 우리가 믿고 나아가야 할 내용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오순절적인 성신으로의 세례는 오늘날 성도 각자가 추구해야 할 제2의 축복이

아니라, 성신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시대가 열림을 알리는 표였습니다!

오순절적인 성신으로의 세례는 오늘날 성도 각자가 추구해야 할

두 번째 축복이 아닙니다.

오순절적인 성신으로의 세례를 2의 축복으로 주장하는 이들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오순절에 성신으로 세례를 받은 제자들은 이미 그 이전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중생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신으로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무능력하고 늘 넘어졌지만, 그 오순절에 성신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인하여 능력 있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제자들이 중생한 이후에 오순절에 제2의 축복을 받아서 능력있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모든 성도들이 중생한 이후에 제2의 축복으로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순절 때와 같이 방언을 하거나 신유의 은사를 받거나 하는 가시적인 축복을 받기도 하고 담대함이나 특별한 능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때와 같은 성신의 능력과 역사가 오늘날에도 재현될 수 있고, 재현되도록 힘써서 구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요즘에 소위 능력받아야 한다’,‘능력전도’,‘능력치유’,‘능력○○라고 하는 말들이 다 그러한 신학적인 해석의 영향을 받아서 나온 말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뜨거워진다는 둥, ‘불을 받아야 한다는 둥, 이러한 말들이 다 오순절적인 성신으로의 세례를 제2의 축복으로 추구하는데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적인 성신으로의 세례는 결코 제2의 축복으로서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성신의 역사 가운데서 살아가는 교회의 시대가 열림을 가시적으로 알리는

표로서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신 강림의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단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단회적이고 반복될 수 없는 것처럼, 오순절에 교회에게 주어진 성신으로의 세례도 구속사적으로 단회적인 사건이요, 반복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에 주어진 성신으로의 세례에 대해서 해명한바와 같이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예고하신 구속사적인 사건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성신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는 교회의 시대가 시작된 사건입니다.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을 가시적으로 알리려는 계시적인 목적과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위임하고 능력을 덧입혀 주시려는 목적으로 주신 구속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단회적 사건입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성신을 주셔서, 성신의 능력과 역사를 힘입어 살아가게 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시대가 시작된 것을 알리기 위해서 성신으로의 세례를 받을 때에 가시적인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의 동질성을 인준하시기 위함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만 아니라, 사마리아에서(8), 고넬료의 가정에서(10),에베소 교회에서(19)에서도 역시 사도들이 안수할 때나 말씀을 전할 때에 성신께서 임하시면서 가시적인 현상들을 동반했습니다. 그렇게 사도행전에 는 예루살렘 교회에 성신께서 임하신 것과 같이 가시적인 현상을 동반하고 성신께서 임하신 것은 어떤 의미와 이유에서 였을까요 ? 오고 오는 시대의 교회들이 받아야할 두번째 축복’(Second Bless- ing)의 선례로써 기록된 것일까요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그 현상들에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가시적인 현상들이 나타났을까요? 거기에는 구속사적으로 초대교회 때에 독특하게 직면한 문제와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회가 막 출범하여 교회의 보편성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와 이방으로까지 확대 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교회의 보편성이 그렇게 힘있고 거세게 이방의 세계에까지 확대되어가는 이러한 시대가 그 이전에는 없었던 일로써, 이제 처음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세워지고 있는 사마리아나 이방의 세계에 세워지는 교회들이 과연 예루살렘 교회와 동일하게 성신의 역사로 세워진 교회인가를 가시적으로 표해줘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방인들을 가까이 하거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이 이방에까지 전파되는 새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새 시대가 도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같은 사도의 경우에도 그 점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보자기 환상을 보여주시기까지 하면서 고넬료의 가정에 보내신 일도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이 이방의 세계에까지 전파되고 거기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는 것을 인준 해 줘야 할 시대적인 요청이 있어서, 성신의 가시적인 역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마리아나 고넬료의 가정이나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안수하고 세례를 줄 때에 성신의 역사가 예루살렘 교회에서와 같이 가시적으로 나타남으로 인해서, 그러한 교회들도 예루살렘 교회와 동질의 교회임을 인증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들과 똑같이 성신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고 인정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시대에 편만해 있던 유대이즘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복음이 이방에까지 뻗어나갈 수 있다는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서 성신의 역사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 뿐입니다.

따라서 오순절적인 성신으로의 세례나, 사도행전적인 가시적인 성신의 역사는 오고 오는 교회에서 재현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성도들이 중생한 이후에 받아야 할 두 번째 축복도 아닙니다. 결코 중생자가 추구해야 할 제2의 축복으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적인 성신으로의 세례는 구속사에서 단회적인 사건이지, 오늘날에도 재현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구속사적인 필요에 의해서 그러한 가시적인 현상을 동반하고 주어진 것입니다.

(2)각 사람은 중생할 때에 고린도전서적인 성신으로의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중생시에 고린도전서적인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날 때에 성신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중생 할 때에 성신을 받으면 어떠한 현상이 나타날까요? 아무런 현상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이 성신으로 거듭나는 순간에 가시적인 아무런 현상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성신으로 난 사람은 계속해서 성신의 인도를 받아가면서 성신으로 난 사람이라는 증거들을 삶 속에서 보이는 것이지만, 성신으로 날 때에 무슨 가시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3:8)

성신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최초의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그러나 거듭나게 하셔서 각자 고립되어 살도록 하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게 하시고, 다른 지체들과의 유기적인 연합과 교통 속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으니라!” (3:26-27)

이렇게 처음 성신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는 아무런 가시적인 현상들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때부터 성신의 역사와 인도를 받아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신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지체들 속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독단적으로 홀로 고립되어서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신으로 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 ‘교회의 한 분자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성신으로 나서 성신의 인도와 역사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의 존재 방식입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떠나서 고립되어 존재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아가지도 않습니다. 성신으로 세례를 받아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가담하여 그 지체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3.성신으로 난 사람의 표와 인, 그리고 존재 방식

성부와 성자께서는 택한 백성에게 성신을 보내셔서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신을 받아서, 성신의 역사 속에 들어가는 것을 성신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신께서 택한 백성에게 오셔서 역사하시는 최초의 일은 거듭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게 하시는 일입니다. 성신으로 세례를 받아 새롭게 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12:13)

(1)성신으로 난 사람은 으로서 교회로부터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성신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는 로서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부여받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새 언약의 유익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로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는 이미 성신으로 세례를 받아 새 생명을 얻었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입니다. 그들로부터 이제 새롭게 가담하는 자라는 표와 인을 받게 됩니다. 소요리문답 제92문을 보면 그점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례가 무엇입니까?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예식인데, 그 속에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유익이 감각적인 로써 표시되며, ‘쳐져서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소요리문답 제92)

저가 할례의 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것이니”(4:11)

교회로부터 받는 세례는 로써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성신으로 나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사람임을 표하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가시적인 표를 보고서 함께 성신으로 나서 지체된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표로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과연 성신으로 난 자라는 실질이 있는가를 보고서 세례를 줘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책임이 실로 큽니다.

그리고 이라고 함은 도장을 찍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분에 대해서 보증할 때에 도장을 찍는 일이 있는 것처럼, 이미 성신으로 난 성도들이 이제 새롭게 성신으로 난 사람에 대해서 도장을 찍어서 보증하는 행위입니다. “이 사람도 우리와 똑 같이 성신으로 나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우리와 한 몸을 이룬 자입니다 !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한 살붙이가 되었습니다 !”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보증해 주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베푸는 입장에 있는 교회에서는 그 사람이 과연 성신으로 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부여받았고 연합된 자인가를 신중하게 확인하고서 책임있게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신분을 보증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과연 성신으로 나서 새 신분을 가진 자 인지를 잘 확인하고서 그러한 실질이 있을 때에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목적으로 그러한 확인도 잘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세례를 남발하게 되면, 그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는 실질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통일성이나 연합이 깨어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성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2)성신으로 난 사람은 거룩한 교통 가운데서 존재하며 살아갑니다!

성신으로 새롭게 난 사람은 각자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분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신으로 난 사람의 존재방식입니다. 각자 고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한 부분으로써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 지체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의 유기적인 관계가 없이 고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함께 모여서 교회를 이룬다고 할 때도 독립된 개체들이 모여서 조직된 조직체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한 지체들이 모여서 연합된 유기체로서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입니다. 유기체라는 말은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요, 그 지체들 사이에는 유기적이고 생명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손이나 발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어떤 성도도 몸인 교회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하는 하나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 성도라는 단어가 62번 사용되고 있는데 늘 복수로 사용되고 있으며, 단수로 사용되는 경우는 단 한번 있습니다. 그것도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4:21)는 구절이기 때문에 모두가 복수로 사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신약의 저자들에게 고립된 성도라는 개념은 낯선 것이었습니다. 은둔자나 고립된 종교적인 은자(隱者)의 개념은 원래 성경적인 것과 거리가 멉니다. 영적인 로빈슨 크루소우가 되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또 신약의 서신들은 대부분(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제외하고) 회중들에게 보내진 것인데, 마치 개개인에게 보내진 것처럼 읽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각자 개인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것은 옳고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개인주의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이것의 원래 의도가 우리를 개인으로보다는 오히려 전체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보고 교훈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게 됩니다.

성신의 인도를 받아 갈 때도 고립된 개체로써가 아니라, 전체의 한 일원으로써 교회 전체의 행진 가운데 들어가서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양의 무리 가운데서 목자의 인도를 받아가는 것입니다.

성신으로 난 사람이 누리게 되는 대표적인 은혜: 성신의 교통케 하심

성신으로 난 사람이 누리게 되는 대표적인 은혜는 거룩한 사귐입니다. 성신께서는 거듭나게 하셔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게 하시고, 또 계속해서 거룩한 사귐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 성신께서 하시는 대표적으로 중요한 일은 교통케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서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을 위해서 복을 기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문구를 가지고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들이 공적인 예배를 마치는 시간에 축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상기해 보십시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고후13:13)

성신께서 베푸시는 대표적인 은혜의 내용은 교통입니다. 성신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되게 하시고 교통하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성신으로 난 사람은 성신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하고, 성신의 교통케 하시는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할 때에도 그러한 내용을 담아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믿는 내용 중에 중요한 한 부분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신으로 나서 거룩한 공회를 이루게 되고, 그 공회의 한 분자로서 서로 교통하면서 살아가는 것임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신께서는 계속해서 다양하게 역사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게 하시는데, 그 중에 하나는 서로 교통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성신께서는 거룩한 사귐 가운데서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새 생명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3)성신으로 난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하여 성도의 교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가시 적으로 표하고, 감각적으로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천국잔치에 들어갈 것을 인침받습니다!

이렇게 성신으로 난 사람은 늘 성신의 교통케 하시는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인데, 그것을 가감적으로 누리며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성찬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찬식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와 성신께서 베푸시는 교통케 하심을 감각적으로 맛보며 누리도록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예식입니다.

성찬식에 참예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음으로 성신으로 나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고, 성신의 교통케 하시는 은혜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실질이 있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가시화하고, 더욱 실제적으로 체험하며 맛보기 위해서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을 성찬식에서 실제적으로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한 교통이 가장 충일하고, 막힘이 없고, 부족함이 없이 이뤄지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때입니다. 그 때에는 삼위 하나님과의 가로막혔던 담이 모두 허물어지고 온전한 사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귐을 이 땅에서부터 부분적으로라도 맡보며 살아가는 것인데, 그것을 가시적으로 맡보는 시간이 성찬식입니다.

맺는말

이미 세례를 받으시고 오늘 성찬식에 참예하는 성도들은 과연 평소에 성신께서 교통케 하시는 역사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시고, 장차 천국잔치에 참예 할 것을 소망하면서 의미 있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하셔서 성찬식에 참예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성신으로 난 자요 성신의 교통케 하심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자라는 실증을 갖으셔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 복된 자리에 참예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 이 땅에서 성신으로 나서 교통케 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만이 천국의 잔치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댓글 2
  • 김성규 2012.10.13 22:05

    좋은 자료에 감사해요, 허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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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성부 2012.12.4 19:37

    허임복목사님!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시한 번 넘 감사합니다. 신성부전도사 넙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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