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는 위험하다
- 운영자 2012.7.7 조회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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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위험하다
- 데이비드 핸선 -
우리 마을에 있는 천주교 병원의 복도에는 실물 크기의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마리아의 모습은 완전한 평화 바로 그것이다. 그녀의 몸은 똑바로 선 모습이지만 긴장하고 있지는 않다. 그녀의 발가락 밑에는 커다란 뱀이 똬리를 튼 채 입을 열고 독을 흘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바로 설교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설교는 뱀을 밟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설교 바로 직전에 찬송을 부르는 동안에 아이들이 예배당을 떠난다. 곧 이어 나는 강단으로 가서 본문을 읽고 설교 원고를 뒤적거리며 설교를 풀어 나간다.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많아진다. 그렇게 되면 나의 의식은 또렷해지고, 나는 눈을 들어 입을 열고 설교를 시작한다.
나는 설교의 방법에 대해서 많은 말을 들었고, 전쟁의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들었다. 설교 준비와 전쟁 준비는 모두 인간의 독창성을 요구한다. 둘 다 우리가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기능에 속한다. 전쟁에 있어서 육박전은 음악의 리사이틀 같은 게 아니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설교는 하나의 예술이다. 그러나 쇼는 아니다. 그것은 음악 콘서트도 아니고 연설도 아니다.
설교는 일종의 공격 행위이다. 우리가 설교하는 동안에 전쟁의 신이신 여호와께서 적을 정복하기 위해서 성전(聖戰)을 수행하고 계신다. 정복해야 할 적은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나는 내 설교 아웃라인을 따라 서서히 대지와 소지를 전개해 나간다. 본문을 설명하면서 논지를 전개할 수 있는 기초 작업을 한다. 그러면서 청중의 눈길을 살핀다. 청중의 반응하나 하나를 다 읽는다.
설교가 전개되면서 논지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청중은 나뉘어지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위로를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은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나는 청중의 마음속에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고 상처를 받은 것 같이 보인다. 자아가 아주 강한 사람에게는 설교가 굉장히 신경에 거슬리는 말씀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가 사람의 자존심을아주 강하게 거슬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 목사로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이쯤 되면 이제 설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격행위는 중대한 일이다.
뱀을 밟는 것은 뱀을 공격하는 행위이다.
그렇게 되면 자존심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된다.
공격을 중단하고 물러서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의 육(flesh)은 조금만 아파도 소리를 지르고, 마귀는 독니를 드러낸다.
인간의 마음은 우주에서 가장 잘 방어된 곳이다.
마음의 요새는 하루 아침에 구축된 것이 아니다.
수년 동안 자기변명과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죄 가운데 있는 영혼은 살아 있는 것 같이 느낄는지 모르겠으나 실상은 죽은 자다.
설교는 한 영혼의 비참한 상태에 빛을 비추어서 자신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게 만들어 그 영혼이 죄로부터 돌이켜 생명 안에서 살게 해야 한다.
청중은 먼저 설교의 직설법--너희들이 바로 회개할 자들이다--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설교의 명령법을 들을 수 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뚫고 들어갈 때 나는 그 공격을 느낄 수가 있다.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이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전체 진리가 전해지기까지 나는 공격의 고삐를 늦출 수가 없다.
정죄는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
포싯(Forsyth)이 말했듯이, “정죄와 그로부터의 해방을 제대로 전하는 목사도 많지 않고, 그 진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청중도 많지 않다.”
나는 주류 교단의 목사로서 상당히 수줍음을 잘 타는 성품의 소유자다.
나는 설교가 끝난 후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빼앗기 위한 전투가 최고조에 달할 때,
지옥불을 외치는 설교자들이 했던 것 같이 내 설교가 어디로 가야 할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한 선이 그어진다.
설교는 반드시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하며, 청중에 대한 요구도 분명히 제시되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각 사람 앞에 플래카드같이 분명히 게시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빛이 있고, 부르심이 있고, 청중에 대한 요구가 있고, 고조된 음성이 있고, 강단을 치는 주먹이 있고, 쿵쿵 구르는 발이 있다.
드디어 뱀은 치명상을 받은 것이다.
이제 복음을 말할 차례가 되었다.
적절한 순간 설교가 이제 막바지에 이렀음을 감지하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한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구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게 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한 영혼이 선을 넘어 생명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은혜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길이신 예수는 스스로를 제시하시는 분이시다.
율법은 분노하지만 은혜는 부드럽게 손짓한다.
율법은 정죄하나, 주님은 자비와 화평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마음을 열고 듣는 자에게 문은 열린다. 기회가 주어질 때 붙들라.
구주를 영접하고, 지금 있는 그 곳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라.
그리고 생명으로 들어가라.<필자소개> 핸선(David Hansen) 목사는 미국 몬타나주 벨그레이드(Belgrade)시에 있는 벨그레이드 커뮤니티 교회 담임 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글은 Leadership 16 (Fall 1995)에 게재된 핸선 목사의 글, “Stepping on the snake: Why preaching is so dangerous” (“뱀을 밟기: 왜 설교는 그렇게 위험한가?)”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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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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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2012.10.13 21:52
허목사님 수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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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등복 2017.3.9 22:15
귀한설교 잘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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